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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3.29 전망 좋은 방 * E.M. 포스터 (8)

모든 것은 조지의 루시를 향한 기습적인 키스에서 시작됐다. 그 사건은 요조숙녀인 루시를 감정의 혼란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상황을 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전에 이미 조지와 루시에게 무언가 일어났음을, 그게 사랑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기에 나는 루시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까지 기다려 보련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녀와 조지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순진한 루시가 선택한 건 떠나는 것이었다. 여행지인 피렌체에서, 조지와 처음 만난 베르톨리니 펜션에서, 전망 좋은 방에서.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만난다. 게다가 이건 작가가 작정하고 쓴 러브스토리가 아닌가. 조금만 인내력을 발휘하면 저 둘은 다시 만날 것이다. 도망치듯 떠난 루시였지만 조지를 다시 만난다면 다시 감정의 혼란을 느낄 것을 안다. 사랑이란 눈에 안 보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작은 불덩이같아서 불쏘시개만 만나면 다시 활활 타오른다.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그 사람의 나쁜 점만 보려하고 일부러 그를 오해하고 싶다. 그를 왜곡하고 싶다. 나와는 상관없는 저 외딴 곳으로 그를 밀어 넣고 싶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울타리는 부드럽고 약해서 감정의 아주 조그만 틈이 보이면 사정없이 밀고 들어온다. 루시가 실수한 건 세실이라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가 조지와 루시가 다시 만나는 다리 역할을 할 줄이야. 신의 장난인지 신의 선물인지 루시는 혼란스럽다.

루시는 좀 더 약아질 필요가 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가 무엇인가.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다른 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지 않았는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루시의 잘못이다.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조지와 루시는 이미 서로에게 운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꿈꾸는 사랑의 해피엔딩이 이 연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일단 숨을 좀 몰아쉬자. 쉴새없이 책장을 넘기며 밤을 샜더니 조금 피곤하다. 모닝커피 한 잔으로도 이 피곤함은 가시지 않는다. 나는 이미 몇시간 전 책장을 덮고 이 연인들과 작별을 했다. 하지만 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조지와 루시는 저 '전망 좋은 방'에서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 그리고 아주 부산스럽게 호들갑을 떨고 싶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졌다고! 바라던 대로 이루어져서 내 마음은 지금 너무 기쁘다고.

포스터의 문장은 아름다웠다. 급하지 않고 천천히 돌아가는 그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마음에 담긴 감정의 묘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지만 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가 담아준 글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싶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감정이란 그런 거다. 그가 보여준 것처럼, 처음부터 확실하지가 않다. 사랑도, 미움도, 원망도 아주 천천히 마음속에 드러나는 거다. 처음부터 알 수 없는 거다. 그의 느림이 좋았다. 그래서 더욱 와 닿았나 보다.

포스터의 예정된 전집이 다 나왔다. 내가 기다릴 필요가 없이 이제 그들이 나를 기다려야 한다. 심술을 좀 불이고 싶다. 좋아하는 감정을 너무 쉽게 그들에게 들켜버리고 싶지 않다. 내 감정을 조금 알 것 같으니 살짝 튕기고도 싶다. 그래야 그들과 내가 연결된 끈이 더 단단해 질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때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살짝 약을 올려줘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