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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4 열정 * 산도르 마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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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오랜세월을 무망함 속에서 침묵을 견뎌온 남자가 있다. 24년간의 우정이라고 믿어왔던 친구와 아내의 불륜을 눈치챈 41년전 그 순간부터 자신의 내적안정을 포기했다. 아내 크리스티나가 병으로 죽을 때까지 그녀와 마주하지 않았고 도망치듯 떠난 친구라 믿었던 한 남자를 기다린다.

오랜 시간을 의문 속에서 견뎌온 헨릭은 콘라드와 재회하며 그에게 그동안에 그가 깨닫게 된 삶의 의미를 들려준다. 헨릭은 콘라드에게 자신이 겪었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며 콘라드에게는 '진실'을 대답해줄 것을 요구한다. 헨릭은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된 인생의 여러 신호들 앞에서 이미 답을 찾았노라 말하면서 인생의 덧없음을, 이미 세월이 너무 흘렀음을 말하며 두가지 질문을 던진다. 헨릭의 말 속에서 최후까지 자존심을 보이면서 지지않으려는 상처입은 자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제는 '무관심'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나이지만, 믿기지 않았던 두 사람의 배신에 대한 질투와 원망의 감정을 풀어야만 했기에.

꼭 지나고 나서야 불현듯 이해가 되는 과거의 일들이 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내면의 의도가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뒤늦게 깨닫게 되는 배신과 실망은 깊은 흉터를 남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들이고, 과거의 일로 현재를 바꿀 수는 없으니 행위의 결과는 이제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행위 뒤에 숨어있던 '의도'는 세월이 지났어도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가 됐다. 죄는 바로 그 '의도'에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이 이토록 섬세하고 다치지 쉬운 감정이구나. 사랑에 버금가는 '열정'으로 헨릭을 증오했던 콘라드도 우울한 젊은 날을 보냈다. 가난했고, 고독했고, 그의 음악에 대한 선율의 언어를 주변사람은 이해해 줄 수 없었다. 단 한사람, 헨릭의 아내 크리스티나는 제외하고. 하지만 그 역시 모든 걸 버리고 현실에서 도망쳤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젊은 날 죽은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헨릭과 콘라드 사이에서, 정조과 욕망사이에서, 안정과 사랑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지만 한 남자는 정열 앞에서 도망쳤고 한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까지 침묵했다. 그리고 그 둘은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헨릭도 인정한 것처럼 그들은 살아있지 않은가. 질긴 목숨 서로에 대한 증오를 품으며 부박하게 연명하고 있지 않았는가.

인간은 참 많은 걸 견디며 살아간다. 외적인 부족함에서 오는 물질적 빈곤, 정신적 방황과 이상과 현실에서 오는 삶의 괴리들을 고스란히 견뎌야만 한다.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부딪치면서도 N극과 S극이 서로를 당기는 것처럼 우리는 그 다름에 끌리게 되고 어떤 우정을 나누지만 정작 마음을 여는 건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이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까운 서로에게 동경과 경멸, 허영과 이기심, 질투를 품게하고 갈등하게 만든다. 나와는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졌다는 이유로. 그런데도 늘 '다른 사람'을 희구하는 우리다. 상처입고 물러나면서도 다시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연약한 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평생을 풀리지 않는 의문과 갈등 속에서 살게 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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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