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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4 경관의 피 * 사사키 조 (2)


나는 양쪽 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두분 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친할아버지의 얼굴은 사진으로나마 뵈었었다. 완고하고 좀체 웃음이 없으실 것 같은 고지식한 인상이었다. 시골  옛날 어른처럼 갓을 썼고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셨다. 하지만 나에게 외할아버지는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나는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그의 사진 한장 보지 못했다. 할머니와 세딸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은 그는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이며 4형제 중 장남이었다. 고향 마을에서는 흔치않게 서울에서 대학교육도 받았고 한동네 출신의 모재벌기업 창업주와는 형님동생 하던 사이로 그 기업의 전신인 ㅇㅇ화약에서 근무하다 젊은 날에 병을 얻어 요절했다. 하지만 이미 40여년 전에 죽은 그의 영향은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어서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와 그의 친동생은 40년 가까이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원수처럼 살고 있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딸만 낳은 외할머니에게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외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장남인 할아버지가 선친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할아버지가 착실하게 손수 일군 그가 가졌던 전부를. 시댁의 배신과 부당한 대우에 외할머니는 젊은 날 큰 상처를 받으셨고 피붙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친정인 서울로 '영원히' 올라가셨다.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그 사람'은 나에게 외할아버지 대신이었다. 이런 사연 덕분에.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외할머니에게 이같은 진실을 듣기 전까지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나를 친손녀처럼 끔찍하게 이뻐해주던 할아버지였다. 그의 친절과 사랑 뒤에는 어쩌면 죽은 형에 대한 미안함과 젊은 날 그와 그 어미가 저지른 추악스러운 행동이 있었으리라 믿게 됐다. 단지 궁금했었을 뿐이다.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에 왜 외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지. 어느 날 외할머니에게 왜 엄마 아빠의 결혼식에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여쭤본 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 발단이었다. 외할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뒤 나의 혈육의 불행 뒤에 그가 있었음을 알게 됐고 난 예전처럼 그를 볼 수 없었다. 그후로 나는 그의 집에 발을 끊었다. 거의 10년 전 일이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키워준 삼촌인 그 사람에 대한 미움보다는 고마움이 더 크다. 엄마는 억울하지 않은지 여쭈다 보면 엄마는 무슨 눈물이 그리 또 많은지. 그래서 늘 명절에는 그의 집에 가자는 엄마의 부탁과 매몰차게 거절하는 나, 속상해서 우는 엄마. 늘 같은 모습이 되풀이되곤 했다.

작년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10여년 만에 그 사람을 만났다. 사돈의 자격으로 장례식장에 온 그 사람은 10년 전 보다 많이 지쳐버린 모습이었다.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던 나의 외할아버지와 많이 닮았으리라. 할아버지가 살아있었으면 노년의 모습이 어쩌면 그와 비슷했으리라. 그 사람은 나를 바로 앞에 앉혀 놓고 예전의 그 사람의 모습과는 다르게 나에게 아주아주 긴 말과 당부를 남겼다. 결국 중요한 건 혈육이란다. 혈육이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명절 때라도 꼭 놀러오라고. 그의 훌쩍 나이 든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보였다. 이제 살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그를 이렇게 미워하고 증오하면 무엇할까 싶었다. 그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보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듯 하다. 이유조차 짐작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날카롭게 굴면 무엇할까. 사실 그사람은 나에게 외할아버지 대신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외할아버지 대신으로 핏덩이인 나를 안아본 사람도 그 사람. 우리 아버지가 인생에서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 아버지 대신 어린 우리를 뒤에서 살펴준 사람도 그 사람. 나는 사실 그 사람에게 준 것보다 일방적으로 받은 게 더 많다. 외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외할머니의 응어리를 내가 이런 식으로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그가 도의적으로 나빴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이런 식으로 묻는 게 맞는 건지 모든 것이 회의가 든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너무너무 불행한 일이고 힘든 일이다. 특히 그 상대가 피를 나눈 혈육이라면.

하지만 이것이 나와 외할아버가 닿아있는 '역사'다. 얼굴도 모르는 그가 나의 배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내가 알아야만 했던 감춰졌던 진실이었고 그 진실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찼고 나는 나이에 어울리는 아주 철없는 방식으로 어른을 대했다. 후회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늙어버린 나의 '큰 어른들'이 젊은 시절에 겪은 아주 큰 시련 때문에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귀한 "경험"을 얻었다. 사람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할 일도 있을 거라는 것. 젊은 날 저지른 과오는 감춰지지 않고 그 자식 세대로 전해진다는 것. 사람이 사람을 미워한다는 건 너무 불행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내 '피'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일부이자 나의 배경, 결국 나인 것이다.

<경관의 피>에 나오는 안조 세이지, 안조 다미오, 안조 가즈야로 이어 내려오는 삼대의 역사와 그 '피'의 특별함을 보며 나 역시 나에게 흐르는 '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이 기회를 통해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그에게 흐르는 '피'의 역사가 있다. 나는 아직 나에게 흐르는 '피'에 대해 풀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이 모든 배경을 이루는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금기가 되어버린 그의 젊은 날의 생애에 대해서 외할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여쭈어보는 것. 비록 그의 죽음으로 할머니는 여자로서는 불행한 삶을 사셨지만 그의 손녀가 그의 할아버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그를 알고 기억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할머니가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 세심한 손을 갖고 있지도 못하면서 노인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건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다. 역자의 후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버지들의 역사는 그 자체가 미스터리다. 세상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풀어야 할 미스터리.

<경관의 피>는 할아버지에서 그 자식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배경을 이루는 진실을 알아가며 삼대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억울하게 죽은 할아버지 세이지의 죽음은 자식인 다미오로 오면서 사건을 풀 수 있는 단서들을 모아가고 여기서 풀지 못했던 진실은 다시 자식이자 손자인 가즈야에게 이어진다. 가즈야를 통해 삼대에게 내려왔던 응어리와 진실이 풀리지만 과거의 일이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다만 진실을 알게 된 가즈야의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철학이 조금 바뀔 뿐이다. 일방적으로 그 영향 아래 놓이는 것이 자식인 가즈야의 삶인 것이다. 아버지 세대가 보여준 삶의 교훈과 큰 틀의 철학. 그말처럼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속일 수 없는 "피"를 물려받는 것이다. 나와 끈끈하게 연결 된 과거의 인물이 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자식 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과오 또한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결혼에 대한 생각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고 더군다나 부모가 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말해서 그 끝이 너무 분명한 돈이나, 자식 세대에게는 짐이 될지도 모를 명예나 명성보다는 어떤 식으로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물려주고 싶다. 미래의 나와 나의 가족들을 위해 현재의 안개 속 삶도 견뎌보는 것이다. 그 끝은 어떨지 그 과정은 기나긴 터널같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거의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정말 나에게 소중하고 소중하지 않았던 것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들을 꼽아 그 정수만 남겨주고 싶다. "이랬더니 이렇더라. 그러니 너는 이렇게 살아라" 라는 일방적인 방향제시(명령)보다 "이랬더니 이렇더라. 나머지는 너의 몫이다."라고 현명한 '틈'을 보여주는 것이 일방적인 것 보다는 나아보인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줄지 고민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것을 배움으로 삼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 같다. 가보가 꼭 금전적인 가치를 매길 물건이라야만 되는 건 아니니. 신념과 그 부모세대가 갖고 살았던 삶의 철학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라면 그 가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 안에 담긴 것들은 좀처럼 잃어버릴 수 없다. 자식 세대들이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그들 마음의 보관함에 담겨 그들의 인생에서 태풍이 몰아치는 고난의 시간, 그들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철학을 물려주고 싶다.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