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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친구의 아내를 짝사랑해온 마크가 그녀에게 찾아가 캐롤을 들려주며 보드지에 써놓은 글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던 그 장면이 아니라, 작가인 제이미가 프랑스에서 글을 쓰던 장면이었다. 조금 낡은 별장의 테라스에서 낡은 나무책상에 앉아 바로 앞에 잔잔하게 흐르는 호수를 바라보며 선선히 부는 바람을 적당히 맞아가며 타자기로 성실하게 글을 쓰던 장면이었다. 그런 제이미를 위해 따뜻한 티를 내오는 오렐리아. 내가 타자기를 처음 봤던 건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촌오빠가 쓰던 타자기였다. 어렸을 때, 오빠네집에 놀러가면 워낙 신기한 게 쌓여 있어서 갖고 놀 비싼 장난감(통기타, 카드, 지포라이타, 워크맨..)들 때문에 비록 나와 놀아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 오빠에게 티비에서만 보던 타자기가 생겼다니.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오빠가 얇은 시집을 타자기로 베껴치고 있었던 모습이다. 아마, 당시에 좋아하던, 혹은 사귀고 있던 여학생에게 주기 위해 그런 거였을지도. 탁탁 쳐내려가며 그 소리에 맞춰 하나하나 글자가 완성되는 모습이 꽤 신기해 보였다. 정말 재밌었던 모습이다. 물론 늘 그렇듯 나에게는 타자기 근처에도 얼씬 못하게 했지만 그리고 내가 건드릴까봐 잔인하게 가방에 넣어서 옷장 위에 올려놓던 그 얄궂은 모습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지만. (ㅎㅎ) 결국 나에게는 아직도 부러움으로 남아있는. 오빠가 타지기를 치던 모습. 

내가 꿈꾸는 몇 안되는 로망 (실은 수만가지의 공상 속에서 갖고 싶은 소품들이 한두개가 아니지만.)중에 타자기가 있다. 디지털 시대에 맞게 요즘은 너무 쉽게 글을 쓰고, 지우는 거 또한 키보드의 ←키만 누르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만인에게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너무 쉽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필름카메라 시절 필름 값이 아까워 신중하게 사진기를 들이댔던 시절이 불과 10여년 전인데. 쉽게 쓰고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쉽게 찍고 맘에 안 드는 사진은 바로바로 지워버릴 수 있는 졸라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노트북이 아니라 타자기였다면 잉크값과 종이값 때문에 조금 더 신중하게 글을 써내려가야 한다면. 아니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뜸을 들여가며 사는 거. 꽤 로맨틱하지 않은가?

결론은 로모와 타자기가 갖고 싶다는 거다. ㅎㅎ

Posted by 마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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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찬익 2008.10.27 1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모와 타자기 모두 가지고 있긴 한데 제 타자기에 맞는 리본 먹지가 여의치 않아 창고에 놓인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네요. 언제인가 결혼을 하고, 넉넉한 공간이 생긴다면 쓸만한 골동품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를 사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옛 기억이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걸요.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인 요즘 시대에는 필름 카메라를 쓰는 것은 되려 서러워요. 친절하기만 했던 단골 인화소 아저씨의 쌀쌀맞은 응대도 그렇고, 친절하게 인화까지해서 건낸 사진을 다시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달라는 소리나 들어야 하고요.

    하지만, 로모와 타자기가 가진 매력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쉽게 쓰여지고, 쉽게 버려지는 시대일 수록 더욱 가지고 싶은 것이니까요.

    • BlogIcon 마빈 2008.10.28 0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워워~ 저의 로망을 두개나 갖고 계시다니요!! 이거 너무 부러운데요^^ㅋㅋ
      저도 언젠가 운동장만한 크기의 저만의 여유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꾸며놓고 싶은 소품들이 한두개가 아닌데 말이죠. (ㅎㅎ) 전에 지인분께서 로모를 갖고 계셔서 한번 갖고 논 적이 있었는데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착 감기는 게 굉장히 탐이 나더라고요. 비싸고.. 또 필름값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 특유의 사진질감을 흉내내는 건 많지만 그건.. 흉내일뿐이니 어디 진짜 로모로 찍는거만 할까요^^;; 타자기는 사알짝 후순위지만 로모는 정말 1순위랍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