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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4 피의 책 * 클라이브 바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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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색다른 호러이야기였다. 9편의 단편을 모은 <피의 책>은 살육과 인육, 피 칠갑은 기본인데다 잔혹함의 농도도 짙은 책이다. 무서웠다. 잔인해서 무서웠던 게 아니라 단편들 속에 담겨진 공포에 대한 은유가 섬찟했다. 개인적으로 호러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즐기는 건 아니지만 보고서 진심으로 무서움을 느낀 적이 없다. 사실 조금 우습기도 하다. 여름에는 오싹함이 최고지. 그러면서 이맘 때쯤 개봉하는 "나는 공포영화예요"라는 이름표를 달고 개봉하는 영화들, 정말 무서울거야. 무섭게 만들려고 우리가 얼마나 진을 뺐는데. 그러면서 변죽은 잔뜩 올려놓고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관객들 수준을 젖먹이 아이 수준으로 무시하는 헐거운 내러티브의 영화들. 복수심을 품고 죽은 관심받지 못한 귀신의 한풀이쯤은 이제 살짝 지겨워주시고, 남보다 책상에 조금 오래 앉아있었고 성격까지 적당히 사이코였던 전교1등의 자살로 인한 학교괴담은 이제는 진부하다.

스티븐 킹이 호러소설의 본좌에 오른 건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지만 그는 대놓고 '공포'소설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를 읽고 이렇게 섬세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따뜻한 감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차갑고도 섬찟한 공포스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거라고. 단지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던 클라이브 바커는 스티븐 킹보다는 좀더 저돌적이다. 더 화끈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근한 소재들에 공포심과 잔혹함을 가득 심어 놓는다.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는 공포와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을 등장시켜 현실을 고통 속으로 몬다. 정체는 매우 모호한데다 인간의 살덩이를 갖고 노는 정도도 매우 잔인한 이들의 존재는 이 소설을 조금 특별하게 만든다.

공포는 특별한게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포의 은유들과 마주한다. 지금이라도 24시간 뉴스채널을 틀어보시라. 집밖도 집안도 안전하지 않다. 테러와 전쟁, 가난과 죽음, 성폭행, 살인, 유괴, 납치, 폭력, 불의의 사고, 겉잡을 수 없는 인간의 '광기'를 실감할 수 있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나 한 많은 귀신이 아니다. 불행의 주인공이 내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영악한 우리는 불행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음에 안도하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겪은 공포에 대해 얘기한다. <피의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포만큼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또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것이 남의 일이라면 더더욱.

나는 공포영화야. 나는 한 많은 유령이야.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피도 눈물은 당연히 없지. 지금부터 몇명의 주인공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될거야. 긴장 좀 해야할 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공포는 무섭지 않다. 나에게 진짜 공포로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스크린 밖에 있는 나는 그 누구보다 안전하다. 내 손에는 갓나온 따끈따끈한 캐러멜팝콘과 콜라가 들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너무 여유있게 앉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그 느낌이 다르다. 나는 안전하지 않다. 공포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느끼는 불안감의 진짜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불안, 그 자체를 공포의 진짜 소재로 사용한거라면 이건 정말 다른 얘기가 된다. 정말 한여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걸. 선선한 저녁에 읽으니까 그냥 무섭기만 하잖아.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