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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31 이현의 연애 * 심윤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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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짐은 실은 그저 네가 떠맡은 거야. 아무도 네게 떠맡긴 일이 없는데 말이야. 내가 떠맡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짐들은 아마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구르고 짐승에 뜯겼겠지. 그렇게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부서지고 사라졌을 거야. 그래서 지금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거거든. -중략- 그러는 바람에 그 짐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네 뒤로 누군가가 떠맡아주기를 뻔뻔하게 기다리고 있구나." -216p-

이현의 사랑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누구도 그에게 이진과 결혼을 하라고, 이진을 위해 그의 인생을 걸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이현은 이진과 결혼했어요. 그들의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었지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담보로 건, 이진이라는 차가운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을 사랑한, 계약이 '종료'되는 날까지 이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이진의 아름다움에 취해버린 사랑에 눈 먼 남자가 택한 농노의 길~ 아, 그 길은 실은 자신에 대한 200%의 확신과 여러번의 이혼경력마저도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고 말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이현'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지요. 사실 이진같이 몽환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매일 안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남자의 '로망'이 아닐까요. 그녀의 서툰 삶의 방식, 익숙하지 않은 상황들에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습조차 졸라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이진'이라는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이 남자에게는 살며시 조여오는 그녀와의 계약 종료일은 현실이 아닌 일인 것 같았겠지요.

하지만 이진에게 정신줄을 놓아버린 이 남자도 아주 가끔 현실로 돌아올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하필 그럴 때 이진과 약속한 '금기'를 깨버리다니요. 비극을 향해서 -슈퍼스타 칼 루이스를 가볍게 제칠 정도의- 미친 속도로 달려가다니요.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죠. 그런 이현의 배신을 기록할 또 다른 이진이 태어나잖아요. 만 세살이 되기 전에 누가 글도 가르쳐주기 전인데도 연필로 기록을 해나갈 아이, 어린이들의 친구 뽀로로보다 지나가는 할매, 할배, 아재, 아지매 영혼들을 친구로 삼을 아이죠. 세월이 흐른 뒤, 이세 공과 이현처럼 또다른 누군가도 이 치명적인 이진의 아름다움을 닮은 아이가 타고 있는 운명의 수레 위에 사뿐히 올라타겠죠. 자신은 조금 다를 거라 오만떨면서 말이죠.

사실 이현이 뭘 그렇게 잘못했나 생각해 봤어요. 이진에게 아낌없이 주기만 했는데 왜 이런 가혹한 운명의 굴레가 그에게 머무는지 말이죠. 분노의 게이지를 다스리지 못해 영혼의 기록이 담긴 이진의 노트를 조금 찢었을 뿐이잖아요. 만3년이라는 기간동안 그렇게 잘해줬는데 하루동안 그에게 일어난 일들은 범인(凡人)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거예요. 아내를 상처한 홀아비에 졸지에 싱글파파가 되어버린. 거기다가 그는 자신의 미래와 아이의 미래도 짐작할 수 있잖아요. 미래의 사위는 이진과 결혼하기 전의 자신처럼 당당한 혈기만 믿고있을 거고 이진을 닮은 이 아이도 이진처럼 순진무구한 얼굴의 아름다움으로 여러 남정네를 홀리며 적당한 농노 하나가 나는 당신의 사랑의 노예~ 매일 밤 당신에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여주겠어요. 나와 결혼해주세요~그러면 엄마를 닮은 팜므파탈 기질로 그 남정네를 정신없이 녹여버릴테니 말이죠. 하지만 이현은 앞선 이세 공과는 다를 거라 다짐했으니 한번 기대해 보죠.

인간은 너무 쉽게 맹세해요. 한계를 모르고 너무 쉽게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걸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해요. 가끔 그 대가는 잔인할 정도로 가혹하죠. 없던 것도 있던 것처럼 만드는 기록의 절대적인 힘을 알았어요. 이진, 그녀의 말처럼 기록은 정말 중요한 것이죠. 특히 이진이 남긴 영혼의 기록은 생령의 기록,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이죠. 그런 것을 왜 날 사랑해주지 않느냐며 갈기갈기 찢어버린 이현은, 어쩌면 누군가의 삶을 뭉개버린 것이겠군요. 그래서 아마 평생을 다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포스처럼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나 봐요. 참. 이번에 태어난 이진2는 영혼의 기록을 쉽게 찢어질 수 있는 '노트'에 하지 말고 노트북같은 걸 이용하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이현은 딸내미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거지요. 마치 신탁을 하는 것처럼. "언젠가 너의 낭군되시는 분께서 짜증을 만땅으로 내시며 너의 기록을 훔쳐봤노라고 고백해올 것이다. 그러면 너도 끝이고 그 남자도 끝이니까 바로바로 백업이 가능한 노트북을 이용해 보렴. 어색해 하는 영혼들에게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그래. 이런 분위기에 차차 적응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아빠는 더이상 이현2를 바라지 않는단다."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