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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2 속죄 * 이언 매큐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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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과 영어 철자는 다르지만 우리말로 발음이 같은 이언 피어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피어스의 작품 중 가장 재밌게 읽었던 작품은 <핑거포스트 1663>이었다.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힘을 실어 말하는 네명의 목격자들의 서로 다른 증언. 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이견없이 사실을 말하기란 '일본이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다. 대한민국 반자이~'라고 고백해 올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속죄>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세명의 등장인물, 같은 일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엇갈림과 기다림, 평생에 걸친 속죄와 남은 자의 이야기.

'이해'와 '오해'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잦은 반목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어린아이의 치기라고 넘기기엔 그 여파가 잔혹할 정도로 끔찍했던 일이 일어난다. 브리오니가 본 것은 상상하기 좋아하는 아이가 말그대로 '지 좋을 대로' 해석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어른들은 비이성적이었다. 마치 뭐에라도 씌인 것마냥 사건을 일사천리로 처리한다. 젊은 청춘들의 마음이 썩어 병들어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이 일로 장미빛 미래를 꿈꾸었던 성실했던 청년 로비는 인생을 짓밟혔으며 그를 사랑하는 여인 세실리아는 동생과 가족에 대한 원망 속에서 전쟁터로 떠난 로비를 기다린다.

로비에게 보낸 편지 속 "사랑해. 기다릴게. 돌아와...." 가슴 저민 세실리아의 다짐. 닳고 닳아 꼬깃꼬깃해진 편지지를 가슴팍에 품으며 오직 그녀에게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는 남자. 그리고 브리오니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시선이 성숙해지면서 속죄의 길로 들어선다. 이 소설이 단순히 브리오니의 속죄記에 머물렀다면 조금 따분한 이야기로 비춰졌을 것이다. 아마 읽는 독자에게는 충분히 전달되는 그녀의 마음을 후에 가서는 지루한 변명쯤으로 퇴색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거다. 용서를 구하러 찾아온 브리오니가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사죄하는 장면에서 세실리아가 간소한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래도 나의 몫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게 되며 느끼는 브리오니의 묘한 안도감, <속죄>는 이렇게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아낸다. 흐트러진 생각의 단편들을 모아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가는 인간의 복잡한 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 세밀한 묘사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만연체의 문단들은 독자의 호흡은 배려하지 않은 듯한 긴 글이라 조금 힘들게 읽히기도 했었지만.

소설가가 된 브리오니는 허구와 사실을 섞으며 미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현실이 그녀와 우리의 바람과는 달랐기 때문이었고 그녀가 평생에 걸쳐 속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인간은 나약하다. 쉽게 상처받지만 상처에서 회복되기는 쉽지 않다. 원한과 분노를 품으며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인간이다. 폭력이라 일컬어지는 수단들도 다양하다. 언어폭력과 육체적인 폭력은 기본 베이스로 깔고 근거없는 카더라식 루머. 대놓고 따돌리는 것보다 더 치사한 은근한 따돌림. 오해와 몰이해에서 빚어지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상처들. <속죄>는 그 중에서도 이기적인 시선이 낳은 오해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를 들여준다.        

개인적으로 비극적인 엔딩보다는 해피 엔딩을 더 좋아한다. 사실 현실에서 엔딩은 없지 않은가.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이 이어지고 가끔 해피엔딩이라 믿었던 과거의 일들을 뒤엎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게 삶이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에서 나는 해피엔딩을 바란다. 그곳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다. 이곳에서 나는 이기적인 시선으로 허구 속 인물들의 삶을 지켜봐도 죄책감은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오해해서 미안하다 사과할 필요도 없으니까. 책의 말미에 나오는 브리오니의 직접적인 고백에 뒤통수를 맞아 조금 서운했지만 사실 그런 게 소설이다. 나는 그녀의 고백에 공감할 수 있다. 허구임을 알지만 이야기 속에서라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한 희망을 보고 잡다. 행복을 상상하고 싶고 나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살아갔다 믿고 싶다. 절망과 비극은 현실에서 충분히 되풀이 되고 있으니까.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