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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26 바둑두는 여자 * 샨 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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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언제였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샨 사가 국내를 방한했을 때 'TV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스튜디오에 초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에게 그녀는 이름만 들어본 작가였다. 동양인 여인이 프랑스어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더빙과 원어를 섞어서. 숱많은 검은머리의 강단있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웃는 얼굴이 무척 솔직하고 예뻐 보였다. 말투도 조곤조곤하게, 함께 나온 패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여유있어 보였다. 성의를 다해 보인 인터뷰였던 것 같다. '바둑 두는 여자'라는 책만 알고 있었는데 그 방송을 보고 그녀의 책을 직접 읽어보고 싶었다. 방송을 본 지 한참된 후 책을 읽게 됐지만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건 사실 그녀의 특집방송 영향이 컸다.

'바둑 두는 여자'는 일본이 중국본토를 점령하기 위해 만주에서 전쟁을 일으킨 1930년대의 격동의 시기가 배경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적인 배경에 비해 소설은 정적이다. 이 소설은 어떤어떤 소설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내용도 특별히 복잡하다고 말할 게 못 되지만 연애소설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도 없다.

두 남녀가 있다. 그 둘은 만주의 소도시 쳰훵이라는 곳의 광장에서 서로 바둑을 둔다. 바둑판을 사이에 둔 남녀이지만 그 둘의 뒤에는 각자의 복잡한 삶이 존재한다. 여자는 중국 중산층으로 유럽유학을 다녀온 부모밑에서 별 어려움없이 지내지만 이제 막 성에 눈을 뜨게 되고 현재 그녀 최고의 관심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바둑판 뒤에 두고 있는 삶의 모습은 단정한 교복 입고 중학교에 다니는 10대 소녀이지만 혁명을 꿈꾸는 상류층 대학생과 사귀고 있으며 그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와 함께 성적유희를 즐기는 대담한 소녀이기도 하다. 어리지만 남녀의 사랑에 대해 갈등하고 살짝 요부적인 느낌도 주는 자신감 넘치는 당돌한 소녀이다. 그녀와 바둑을 두는 남자는 일본군 장교이다. 테러리스트를 잡아내기 위해 광장에서 중국군중과 섞여 어리숙한 베이징출신 젊은이로 위장중이다. 그는 천황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군인이고 싶어한다. 소녀는 남자를 '무명씨'라고 부르며 그의 이름이나 나이는 모르지만 그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낀다. 남자는 그녀를 아직 소녀티를 벗지못한 순수한 소녀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묘한 신비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 둘은 서로에게 사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 둘이 광장에 있는 바둑판에 서로 마주 앉아 집중하는 것은 대국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며,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뒤에 두고 있는 그 둘의 삶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우며 힘들기 때문이다. 그 둘은 바둑을 두면서 잠시나마 현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서로의 진짜 모습에 대해 드러내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이 둘이 함께 바둑을 둘 수 있는 전제조건임을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듯.

챕터마다 여자의 이야기와 남자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여자는 처음에는 정말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성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녀는 점점 여인의 삶을 알아가게 된다. 남자는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천황과 동포에 대한 충성심을 지닌 죽음도 두렵지 않은 강한 군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고향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며 자신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겉모습은 단단하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부드럽고 섬세한 감정을 갖고 있는 남자다.

샨 사의 문체는 정적이고 시적이다. 절제된 감정묘사로 소녀와 남자의 감정이 살며시 드러난다. 날카롭지만 섬세하다. 바둑을 소재로 이렇게 아름답고 서정적인 소설을 쓰다니. 그렇지만 결말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내가 생각한 결말이 아니라 아쉬웠다. 남녀의 감정이 동양적이게(?) 드러난다고 해야하나? 작가가 함부로 남녀의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은 것 같다. 조심스럽게, 마치 흙 속에 묻혀 있던 상자를 파서 살살 흙을 털어내며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확인하듯이 남녀의 감정도 그렇게, 조심스럽지만 천천히 나중에는 극적이게 드러난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궁금함이 남는다. '그 둘은 사랑이었을까?'하는 묘연함 말이다.

무척 빨리 읽히는 편이다. 남녀가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챕터도 비교적 짧게짧게 이어지는 편이라 진도가 빨리 나간다. 남녀의 각자의 이야기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재밌다. 여인의 이야기는 적당히 야하고(^^;) 남자의 이야기는 거칠지만 솔직하다. 샨 사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작가이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이 책 또한 프랑스에서 출판됐다. 남의 나라 언어로 소설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쓴 소설이 그 나라 국민에게 재밌게 읽힌다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샨 사라는 작가가 프랑스에서 인정받고 있다라는 건 그녀 글이 허투로 쓰여지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이제 한 권 읽고 그저 좋다고만 하는 것도 못 미더울 행동이지만 말이다.^^;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