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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8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 장석남 & 김선우 해설 / 클로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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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두꺼운 국어 (상,하) 교과서는 쉬는 시간 베개로 삼고 자기에 참 좋았다. (나름 이미지 관리를 위해 쉬는 시간이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꼭 쉬는 시간만은 아닐 수도.) 국어시간이 즐거웠냐고? 아니 전혀. 국어시간은 나의 공식적인 취침시간이었다. 창 밖의 운동장을 나른하게 바라보며 쏟아지는 잠을 절대 참지 않고 혼자만의 시에스타를 달콤하게 즐기는 시간.

시를 배울 때,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는 건 수능 때 최악의 점수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주관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느끼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우리들 앞에서 해부되고 분석당하고 벌거벗겨졌다. 몇권의 시집을 낸, 시인선생님도 계셨지만 우리는 버릇없게도 유독 그 선생님 수업시간을 무시했다. 이유는 못 가르친다는 거였다. 딴 얘기만 한다고 우리는 선생님을 힐난했다. 돌이켜보면 그분이야말로 문학을 사랑하셨던 정말로 시를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려 했던 분이셨는데. 교단에서 은퇴하기 전에 가르치는 마지막 제자인 우리들에게. (검색해보니 최근에 시집을 또 내셨다. 헉!)

국어시간에는 유독 아이들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교과서에 머리를 처박고 색볼펜으로 선생님이 메모하라고 하는 곳에 예쁘게 체크하면 그만이었다. 작품을 읽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대해 배워야했다. 내재율이 어떻고 외재율이 어떻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어떻고. 긍정의 시어에는 동그라미를 부정의 시어에는 세모표시를. 표현방식, 특히 역설은 반드시 시험에 나오니까 절대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표시해 둘 것! 국어교과서는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색볼펜으로 적나라하게 분석된 해부도로 가득한 책이 되어가고 있었다. 국어시간이 즐거울 리 없었다.

주옥같은 언어로 작품을 쓴 수많은 시인들께서는 아마도 당신들의 시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분석당하고 해부되는 걸 원치 않으셨을거다. 당신들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껴줬으면 하셨을거다. 하지만 나는 기계처럼 나도 모르게 시어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눈으로 시를 가위질하며 형식을 분석하고 있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런 나에게 시가 마음에 다가올 리 없다. 이렇게 냉정한 눈으로 작품을 대하는 인간인데. 그리고 지병으로 얻은 게 하나 있다. 시란 어렵고 난해하다는 것.

물론 나에게도 시가 재밌었던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마니또며 교환일기가 유행이었다.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게 유행이었고 달콤하고 귀여운 시를 편지에 적어 넓은 칸을 매우기도 했다. 왜 그런 시 있지 않은가. 국어시간에는 너의 이름을 써보고 수학시간에는 너와 나의 관계를 계산해 보고 영어시간에는 i love you... 뭐 이런 귀여운 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시를 가까이 하기에는 내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

그렇지만 시가 없는 세상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요즘에도 많은 연인들이 시의 은유를 빌려 마음을 고백한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마음을 적는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어보셨는지. 아마 네루다에게 메타포를 배우지 않았다면 마리오는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인에게 마음을 고백하겠다며 사랑시를 추천해 달라고 인터넷의 문을 두드린다. 수많은 시들이 조각이 되어 인터넷을 떠돌지만 때로는 그 많은 조각들은 선한 낚시꾼의 낚싯대에 걸려 사랑의 언어로 요리된다. 감미로운 로맨스로 포장되어 설레이는 마음과 함께 연인에게 보내진다.
 
사랑으로 가득한 사랑의 시는 언제 읽어도 좋다. 늘 시를 접하는 시인의 눈과 마음에 엄선된 시라면 더더욱. 꼭 그 모든 시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어도 말이다.『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이 책에 대한 감상은 시에 대한 개인적인 두려움의 변명을 늘어놓는데 급급했지만 시인의 개인사가 적절하게 언급된 해설과 함께 읽으니 시가 좀더 마음에 와 닿는다. 나처럼 시에 대한 지병에 버금가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빈한한 인간에게도.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