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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10 두 해 여름 * 에릭 오르세나 (8)

번역가 질은 한적하게 번역에만 몰두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던 중 B섬까지 오게 된다. 섬의 원주민들 보다는 휴가철에 몇달 들렀다가는 여름주민들이 더 많은 그 작은섬에 번역의 둥지를 틀게 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번역의뢰가 들어 온다.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에이다'가 그 주인공인데 우리의 예비노벨문학상 후보자께서는 자신의 작품에 너무 애착을 갖고 있는 나머지 번역되는 작품들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역자들을 괴롭히기로 소문이 나있는 상태.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질은 함께 동봉된 거액의 수표에 마음을 뺏겨 흥쾌히 수락한다. 굶고 있는 수십마리 고양이의 가장이기에.. 하지만 천성적으로 서두를 줄 모르는 질은 번역에 매달린지 3년 5개월이 지나도록 아직 초안조차 끝내놓지 못한 상황. 기다림에 지친 출판사도 결국 독촉을 시작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섬의 주민들은 작은 힘이라도 질을 돕기 위해 아마추어 번역에 뛰어든다. 두 해 여름동안.

유쾌한 문장들로 가득찬 에세이집 같은 것 하나를 읽은 기분이다. 은유와 풍자가 가득한 구절들..극적인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정말 섬사람들이 출판사 독촉에 시달리는 번역가를 돕기 위해 잊어버린 영어 실력을 총동원해 그를 도왔다니.. 그토록 열성을 다해 주민들을 이끈 화초를 키우던 여인이 생텍쥐페리의 증손녀였다니. 책의 저자인 에릭 또한 그 주민들 중 한사람 이었다고.

얼마전에 읽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에도 아름다운 메타포들이 가득했는데 이 책도 그에 못지 않은 은유들로 가득하다. 차이가 있다면 '네루다~'는 좀 직설적이고 '두 해 여름'은 풍자적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직업상 책들을 시간의 늪에서 건져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간, 아니 그보다 영원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 영원이라고 하는 집에는 너무 많은 책들이 갇혀 있습니다. 위대한 소설을 향한 꿈, 완벽한 번역에 대한 동경, 요컨대 현실의 옷을 입지 않은 구상들은 그 집이 너무 편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안락한 주거에서 그것들을 끌어내어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현실의 공간 속에.. 예를 들어 서점 진열대 같은 곳에 말입니다"
-번역을 독촉하러 온 출판사 직원의 말-


내 책꽂이에 꽂혀있는 절반 이상의 책들은 번역가들의 손을 거친 책들이다. 거의 대부분이 번역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작가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책을 번역한 번역가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관심있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책의 초반에 번역은 나룻배를 부리는 뱃사공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렇군, 뱃사공.. 나루를 건너기 위해 배에 올라탄 객은 노를 젓는 사공에겐 별다른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의 목적은 건너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찬찬히 노를 젓는 사공과 가벼운 대화라도 주거니 받거니하며 관심있게 보아준다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 다만 너무 형편없고 성의 없는 노젓기로 길을 잘못들어 편안히 건너려는 객을 너무 피곤하게 하면 그 사공도 할말 다 했지 뭐^^;;

Posted by 마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