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 앞의 생>이 슬펐던 이유는 열살짜리 모모가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읽으면서 우울감이 밀려왔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소설 속에서 모모는 그렇게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길러주는 로자 아주머니는 모모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존재다. 뚱뚱하고 못 생겼고 계속 못 생겨지고 있지만 그런 로자 아주머니라도 있어서 모모는 외롭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모모의 주변에는 모모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밀 할아버지,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의 여러 친구들,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고 모모를 많이 걱정해주는 주변의 사람들. 하지만 그럼에도 모모는 가끔 울적해질 때가 있고 그럴 때는 상점에서 물건을 훔쳐다가 어딘가에 버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곤 했다고 한다. 모모가 살고 있는 환경은 좋은 환경은 아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부모가 있었고 친구들 중에는 마약으로 돈을 버는 친구들도 있고 로자 아주머니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모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엉덩이로 벌어먹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따뜻한 소설이다. 모모를 걱정해 주는 이웃들이 있었고 못 된 말로 아이들을 나무라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로자 아줌마가 있다. 그리고 모모를 많이 사랑해주었다.

겉으로는 순진한 말을 하지만 모모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면 그 속에는 모모가 바라보는 삶의 진실이 담겨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같은데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너무 많을 걸 보고 있었다. 사랑받고 싶어하고 관심을 바랐다. 그런데 그런 감정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억누를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는 모모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행복해지려고 마약을 하느니 지금 이대로의 삶을 살겠다고 말하는 열살짜리 아이.

어른들이란 사람들은 아이가 아이다운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야 그들이 안심할 수 있으니까.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면 것넘는다고 생각하고 경계한다. 그런데 아이가 또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건 또래보다 더 많은 걸 겪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필요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아니라 필요이상으로 많은 걸 경험하게 된 거다. 아이가 많은 걸 직접 할 수 밖에 없는 주변환경을 돌아보라. 아이에게 어떤 경계선이 쳐져 있는지. 혹시 주변의 무관심한 환경이 아이 주위에 쳐져있던 경계선을 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싶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까봐 마음 졸이는 모모는 실제 책의 작가 로맹 가리와 닮은 것 같다. 그가 남긴 수기 형태의 유서를 읽어보면 문단의 기성작가로 남아있어 처음 받았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해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를 탄생시킨다. 그가 권총 자살한 뒤 출간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읽어보면 기존의 평론가와 문단에 대한 그의 조소와 통쾌함이 닮겨 있었다. 진실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데 아는 체하는 평단이 얼마나 우습고 만만하게 보였을까. 한편으로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알아주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남아있는 듯 해서 에밀 아자르로 사는 동안 그의 심경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외로움과 무관심.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난다면 닫혀진 죽음의 문에 '똑똑' 노크를 하게 될 수도.
혹시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들리면 대답 좀 해주세요. 아니면 문이라도 열어주시던지.

Posted by 마빈